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문단 편집) === 인명피해 === 사망자 명단은 [[http://en.wikipedia.org/wiki/Deaths_due_to_the_Chernobyl_disaster|영어 명단]]과 [[http://ko.wikipedia.org/wiki/체르노빌_원자력_발전소_사고의_사망자_목록|한국어 명단]] 참조. *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아키모프 선임연구원으로, 동료인 레오니트 톱투노프와 함께 실험을 진행하던 중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인해[* 원자로의 출력 이상을 확인하고 정지를 시도했다는 설과 실험종료 후 일상적으로 원자로를 정지하는 절차에 따라 실험이 종료되어서 원자로를 정지시키려 했다는 설이 있다. АЗ-5 작동 과정에는 아키모프와 톱투노프만이 참여했기에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후 조사위원회에서도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생존직원의 증언에 의하면 버튼이 눌려질 때 제어실 내부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했다고 한다.] 원자로 비상정지 버튼(АЗ-5)를 작동시켰으나 당시 이들이 알지 못했던 제어봉 설계의 잘못된 부분으로 인해 원자로가 과부하를 일으키면서 폭발했다. 사고 직후 14명의 소방관들을 지휘하여 화재 진압을 시도했으며 이후 톱투노프와 함께 원자로 근처의 냉각수 밸브가 있는 곳으로 가서 엄청난 양의 방사능을 뒤집어쓰며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해 밸브를 작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원자로는 이미 파괴되었으며 원자로로 통하는 냉각수 배관은 대부분 충격으로 파괴된 뒤였기 때문에 냉각수 밸브를 작동시켜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고 결국 톱투노프와 함께 추가적으로 피폭되며 쓰러진 채 소방관들에게 발견되었다. 아키모프는 톱투노프와 함께 병원에 실려간 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범인으로 손가락질당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아키모프는 15시버트 이상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기 때문에[* 2006년 BBC판 체르노빌 다큐에서 발전소 동료들이 피폭량을 뢴트겐 단위로 말할 때 난 1500뢴트겐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1500뢴트겐을 시버트로 환산하면 15시버트다.]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인해 사망했다. 쌍둥이 동생으로부터 골수 이식을 받았으나 지나친 피폭 탓에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임종 이전 말을 할 수 있을 때 “난 모든 걸 올바르게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사후 용기 칭호가 수여되었다. * 발레리 일리치 호뎀추크 순환펌프 기사. 이 사고의 '''첫 번째 사망자'''다. 사고 당시 아나톨리 댜틀로프의 지시에 의해 북쪽 메인 순환펌프 엔진실의 맨 끝에서 순환펌프를 작동하고 있다가 펌프가 심하게 흔들리며 증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상황을 목격했고 아키모프에게 보고하려는 순간 원자로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는 폭발에 직접적으로 휘말린 데다 곧바로 붕괴된 발전소 외벽 잔해에 매몰되었다.[* 원자력 발전소 직원 중 생존자인 알렉산드로 유브첸코가 인터뷰 중 "발레리 호뎀추크가 서 있었을 자리가 붕괴된 잔해들로 덮여있는 것을 보고 호뎀추크가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으며 이때 유브첸코는 거대한 빛줄기가 파괴된 원자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봤다고 한다. [[체렌코프 현상|"푸른 색을 띤 빛이었는데 레이저]] 같았으며, 매우 아름다웠다"고 언급했다.] 호뎀추크는 폭발로 인해 즉사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폭발한 원자로와 너무 가까운 데다 북쪽 메인 순환펌프실은 완전히 무너져 매몰된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도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폭발로 인해 유해 자체가 흔적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게다가 석관 제작 과정에서 지지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북쪽 펌프룸에 콘크리트를 채웠기 때문에 석관을 해체하지 않는 이상 시신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시신을 찾지 못한 탓에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무덤은 시신이 없는 가묘이며 원자로 3호기와 4호기 사이의 공간에는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고 매년 유족들이 추모하기 위해 방문한다고 한다. * 발레리 페레보스첸코 사고 후 댜틀로프의 지시로 알렉산드르 쿠드럅체프, 빅토르 프로스쿠랴코프와 함께 원자로에 제어봉을 수동 삽입하기 위해 원자로 홀에 진입했다가 폭발한 원자로를 확인함과 동시에 피폭되었다.[* 진입했을 때 이들이 본 것은 아래의 어둠 속에 있는 분화구 같은 원자로 잔해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란색 광선에 비쳐 보인 옆으로 쓰러진 원자로 뚜껑 엘레나와 그것에 장착되어 있던 증기관과 연료봉들의 너덜너덜해진 잔해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자신들이 폭발한 원자로의 불타오르는 분화구를 직접 내려다보았음을 깨닫고 공포에 질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애초에 제어봉은 인력으로 조작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제어봉 수동 조작을 지시한 댜틀로프도 잠시 뒤 이 점을 깨닫고 밖에 나간 이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이미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친구인 호뎀추크를 비롯한 동료들을 구출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6주 후에 숨졌다. * 이반 오를로프 원자로 제어를 시도하다 피폭되어 사망했다. * 바실리 이바노비치 이그나텐코 사고 직후 투입된 14명의 [[소방관]] 중 한 사람. 계급은 중사.[* 당시 소련은 [[군대]], [[경찰]], [[소방]]이 같은 계급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서구권 국가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다. 경찰로 따지면 [[경장]]에 해당되며 [[소방관]]으로 따지자면 [[소방교]]에 해당된다.] 발전소 지붕과 원자로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노출된 원자로의 노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소방관 중 한 명이었다. 14시버트 이상의 치명적인 방사선에 피폭된 그는 곧 매우 심각한 급성 방사선 증후군(ARS)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프리피야트 병원에 잠시 머무르다가 모스크바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2주뒤인 1986년 5월 14일에 ARS 합병증으로 숨졌다. 링크에 따르면 피폭 후 입원한 이그나텐코를 만나기 위해 당시 [[임신]] 중이어서 문병이 불가능했던 아내 루드밀라 이그나텐코는 "이미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 둘이 있어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여 허가받아 입실하였고 남편이 죽는 그 날까지 병실에 함께 있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의하면 남편이 죽을 때는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때 "남편과의 신체적 접촉(키스나 포옹 등)을 금하라"는 지시를[* 이때 [[의사]]는 '''생체 원자로'''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무시하여 루드밀라도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피폭되었고 태중의 딸 나타샤는 더욱 더 영향을 크게 받아 선천성 심장기형과 간경변으로 인해 '''태어난 후 불과 5일 만에 사망'''했다.[[http://chernobylproject.blogspot.kr/2011_10_01_archive.html|#]] 루드밀라도 피폭에 무사할 수는 없어서 2년 뒤 급성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겨우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의사로 일했던 알라 샤피로에 의하면 피폭자와 접촉해도 피폭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바실리가 오염된 소방복을 벗고 샤워를 했기에 류드밀라가 접촉했다고 해도 위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피폭자 치료에 관여한 로버트 피터 게일도 역시 피폭자 자신에게 방사선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폭의 위험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고 당시인 1986년에는 이런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의하면 움직이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 피부는 갈수록 벗겨지고 입안에서 간 조직과 폐의 조각을 계속 토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됐느냐면 고선량의 방사능 피폭을 당한 뒤 [[염색체]]가 심하게 손상되어 신체가 정상적인 세포분열을 통한 회복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산 채로 온 몸의 조직이 괴사되어 간다.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 문서를 참조해 보면 알 수 있다. 2019년 12월에 [[BBC]]에서 아직 생존 중인 루드밀라와 이에 대해 인터뷰하기도 했다. [[https://www.bbc.com/news/av/world-europe-50731500/the-real-lyudmila-from-chernobyl-speaks-for-first-time|#]] 생전의 바실리 이그나텐코는 상당히 체구가 크고 몸이 건장했다고 한다.[* 소방관은 상당한 신체 능력을 요구하는 직업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류드밀라와의 결혼 사진이나 형제들과 찍은 사진을 보더라도 한눈에 봐도 체구가 크고 탄탄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고선량의 방사능 피폭 앞에선 이 건장한 체구의 청년도 별 수 없었다. * 블라디미르 샤셰노프 자동 시스템 엔지니어로 사고 당시 604호실에 있었다고 한다. 604호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폭발에 의해 고온의 냉각수와 증기를 뒤집어썼으며 무너진 철골 빔에 깔려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졌다. 바닥에 고인 물에 몸이 반쯤 잠기고 입에서 피거품을 뿜어내는 상태로 동료들에게 발견된 그는 프리피야트 병원에 후송되어 즉시 치료를 받았으나 척수파열, 전신화상 및 장기 손상으로 인해 사고 당일인 1986년 4월 26일 5시 또는 6시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도 치사량의 피폭을 당했으나 급성 방사선 증후군이 도지기도 전에 외상이 너무 심해 사망했다.] 당시 목격자들에 의하면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 "거기, 발레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근무 중이던 펌프기사 발레리 호뎀추크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호뎀추크는 잔해에 깔려 실종되었다.] 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고 하며 의료 부서의 직원에 의하면 병원에서 그는 의식을 회복한 후 "나한테서 멀리 떨어지세요, 나는 그 원자로실에 있었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 자신 근처에 있으면 당신들 역시 피폭될 것이니 접근하지 말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는 4월 29일 체르노빌 근처 치스토할리우카(Чистогалівка) 마을[* 사고 반경 10km 내에 있던 마을 중 하나이며 사고 이전에는 986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6년 5월 3일 주민대피가 시작되었고 대피 후 모든 목조주택들을 철거하여 매립했다고 하며 사고 이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마을이다.]의 공동 묘지에 묻혔다가 1년 후 꺼내져서 동료 29명과 함께 모스크바의 공동묘지에 재매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발레리 호뎀추크와 함께 폭발로 인한 초기 사망자 중 한 명이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만 올레크 겐리흐처럼 폭발로 수증기를 뒤집어쓰고도 살아남은 사람도 있다. 다만 올레크 겐리흐는 예외적인 경우고 부상에 의해 2명, 방사선 피폭에 의해 29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투입된 인원 중 중 25,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쪽은 정말 방사선 때문에 사망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아서 비공식 집계로 남아 있다. 당시 피폭 인원이 제대로 집계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피해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애매한 저수준으로 피폭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소련]] 정부는 제한된 사람들(주로 공산당원 위주)만 치료해 주면서 아전인수격으로 데이터를 해석했다. 냉전 시기의 [[소련]]은 사고 피해를 줄이고 자료를 숨기기만 했으니 서구권에서는 소련에서 내주는 자료만 가지고 사고 경위나 피해를 말 그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의도적으로 축소한 자료를 다시 의도적으로 부풀려서 장님 코끼리 더듬듯 실제 피폭자를 추정하다 보니 결과물의 정확도가 엉망이 되었다.[* 예를 들면 자연사한 사람이나 살아 있는 사람마저 피폭으로 죽었다고 카운트한 등의 사례가 있다.] 이 대형사고로 인해 지금까지도 이 발전소 주변 지역이 몽땅 출입금지 지역[* 이 지역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사마셜'이라고 불리는 체르노빌 출신뿐으로,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죽음을 맞고 싶어하는 노인들에 한해 살 수 있다고 한다. 식량은 내부 피폭을 막기 위해 외부에서 가져와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게 밀봉된 채로 지급된다. 전면 무료 의료 지원이 제공되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조건 건강검진을 받는다.]으로 묶여 있다. [[스리마일]]에 이은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원자력 발전소]]는 대표적인 기피시설이 되었다. 디스커버리 다큐멘터리에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사고 당시 [[프리피야트]]는 물론 [[키이우|키예프]]도 정상치보다 '''수천 배'''는 더 높은 방사능 오염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국은 다가오던 5월 축제(5월 1일 [[노동절|국제노동절]], 5월 9일 [[독소전쟁|대조국전쟁]] 전승절)를 준비하기 위해 이 사실을 숨겼다. 체르노빌 사고로 현장지휘를 맡았던 [[발레리 레가소프]]도 높으신 분들에 의한 강압과 정치적인 힘에 눌려 UN 사고청문회에서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소련 정부에서 날조한 거짓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후 전세계 인류와 사고로 인해 죽은 자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이때 원자력 사고 수습 과정에서 레가소프도 피폭의 영향으로 해가 갈수록 폐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고 한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상황과 과학자로서의 양심, 죄책감에 죽기 직전에 모든 걸 폭로하는 음성과 자료를 낱낱이 공개하고 바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각 단체마다 사망 입증과 집계 방식, 그리고 기준이 천차만별이라 정확한 피해 수치의 통계는 알 수 없다. 본 문서의 서술에서는 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 의사회의 2011년 보고서에 따른 83만명의 근로자를 피폭자 기준으로 한다. 83만명이 아닌 다른 기준을 쓰기도 한다. 연간 평균적으로 130~170밀리시버트의 방사능에 계속해서 피폭되었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도쿄]]는 연간 7밀리시버트. 원래 자연 방사선은 11~1 사이를 왔다갔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노출된 환경은 이보다 10배 강했다.] 작업 초기인 1986년에서 1987년 사이에 누출 방지와 누출 방사능 처리 작업에 투입된 해체작업자들 22만 6천 명을 기준으로 보기도 한다.(EXPOSURES AND EFFECTS OF THE CHERNOBYL ACCIDENT, 526쪽) 그래도 추적조사를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어서 2012년 11월 8일 [[미국]]에서 사고 현장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에 대한 추적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자세한 건 관련 소식 문단을 참고하면 된다. 이러한 조사는 2021년에도 다시 진행되었는데 미국 국립암 연구소 예이거 박사팀은 체르노빌 사고 청소에 동원되어 방사능에 노출된 105명과 그들의 자녀 130명을 조사한 결과 본인은 물론 배우자와 자식도 방사선에 의한 유전자 변이는 확인되지 않았다.(Lack of transgennerational effects of ionizing radiation exposure from the Chernobyl accident, Science 2021. 5. 14.) 다행인 건 지하 콘크리트층이 뚫리는 수준의 [[멜트스루]]는 피했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까지 갔더라면 지하수가 오염되어 희생자 수는 수십 곱절이나 늘었을 것이다. 한편 위에 언급한 알렉산드르 아키모프, 바실리 이그나텐코 등 피폭 희생자들은 죽은 뒤에도 그리 편하지 못하게 되었다. 심하게 피폭된 관계로 그들의 시신 역시 심각한 수준의 '[[방사성 폐기물]]'이 되었기 때문에 [[납]]으로 된 관에 안장한 뒤 용접하고 콘크리트로 구덩이를 채우는 형태로 매장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고 직후 주변으로 신속한 피난이 이뤄졌기 때문에 직접 사고 처리에 투입된 인원을 제외하면 방사능에 의한 직접적 건강 영향을 받은 주변 거주민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고발생 20년후 WHO의 조사에 의하면 복구 작업에 투입된 인원에서 고형암과 백혈병 발생의 상대적 증가율은 1%, 0.1% 수준이었고 30km 주변 지대 피난자들에서는 둘다 0.1% 미만으로 거의 큰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https://m.blog.naver.com/simkibo6565/220644585010|출처]] 오히려 현재까지도 문제가 되는 것은 사고 당시 충격으로 인한 '''심리적인 피해와 정신적인 피해'''다. 하루아침에 직장과 고향을 잃게 된 주민들의 심리적 트라우마는 이후 높은 알콜 중독, 자살률 등으로 수십년간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특히 방사능에 대한 과도한 공포는 엉뚱한 결과로도 나타났는데 일례로 [[북유럽]]에서는 기형아가 발생할까봐 10만 건 이상에 달하는 [[낙태]] 수술이 행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